응 / 문정희
햇살 가득한 대낮
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?
네가 물었을 때
꽃처럼 피어난
나의 문자(文字)
"응"
둥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있고
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
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
오직 심장으로
나란히 당도한
신의 방
너와 내가 만든
아름다운 완성
땅 위에
제일 평화롭고
뜨거운 대답
"응"
먼 길 / 문정희
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,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!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
나는 허상이란 것을 생각했다 삶이 회오리처럼 오간다고 할때 삶의 또 하나는 그림자이다. 잔잔하고 작은 것들이 쉬는 숲길에 이르러서야 나 아닌 많는 것들이 가지를 치켜세우며 잎을 떨며 하늘의 비를 먹고 이내 얌전해 한다 쥭움도 때론 살아있다. 주위의 어둠, 어둠은 잠으로 피로를 푸는 생명의 安家다. 그러므로 나는, 나의 나는, 잊는 듯 오래이지만 기억해준 허상에 항상 고마워한다. 어두워졌을 때 성좌처럼 다가온 밤, 길의 인기척, 또는 숨소리, 우리는 언제 빛처럼 다가가서 나의 물낯 그 여정의 긴 모습을 훑어볼 것인가, 까마득하지만 그립다. 곁을 떠나지 않는 나의 빈 것들에게 오늘은 껴안고 얼굴을 부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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